레드 데드 리뎀션의 역사적 배경

작품의 배경은 1899년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일제강점기 약 10년 전인 대한제국 시기에 해당합니다. 흔히 말하는 중세시대는 일반적으로 15세기 말에 막을 내립니다. 중세의 끝은 보통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1453년을 기준으로 삼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1499년 무렵을 중세의 마지막 시기로 보는 편입니다.그 이유는 1453년 이후에도 중세를 대표하는 중요한 사건들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잉글랜드 왕국의 내전인 장미전쟁이 있었고,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연합해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 있던 마지막 이슬람 세력인 그라나다 토후국을 정복하며 레콩키스타(스페인어로 재정복)를 완성했습니다. 이는 현대 스페인의 기반이 마련된 역사적 전환점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1499년 무렵까지를 중세의 마지막 시기로 보는 편입니다.

아무튼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에 알려지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스페인의 지원을 받은 이탈리아 출신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롬버스는 동인도로 향하는 새로운 무역로를 찾기 위해 서쪽으로 항해하다가 우연히 바하마 제도의 한 섬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그곳의 원주민들을 인도인이라고 착각해 인디오(오늘날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라고 불렀습니다. 흥미롭게도 콜롬버스는 자신이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기 전까지 자신이 아시아에 도착했다고 믿었으며, 당시 일부 학자들과 탐험가들은 그곳이 아시아가 아니라 새로운 대륙일 가능성을 제기했음에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또또 다른 이탈리아 출신 탐험가인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여러 차례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 인근을 탐험하며 이곳이 아시아가 아닌 새로운 대륙이라는 사실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따 이 대륙은 아메리카(America)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콜롬버스는 바하마 제도에 도착한 뒤 히스파니올라에서 원주민들에게 강압적이고 잔인한 통치를 펼쳐 오늘날에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반면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신대륙이 아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지도 제작과 지리학 발전에 큰 영향을 준 것 외에는 크게 비판받을 만한 행적이 적어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편입니다. 다만 신대륙이라는 표현도 엄밀히 말하면 맞지 않는 표현입니다.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훨씬 이전부터 수많은 원주민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살아왔으며, 유럽인 가운데서도 처음으로 아메리카 땅을 밟은 인물은 콜롬버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세 초기 아이슬란드의 바이킹 레이프 에이릭손은 약 1000년경 그린란드에서 서쪽으로 항해해 유럽인 최초로 북아메리카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이곳에 작은 바이킹 정착지를 세우고, 고대 노르드어로 포도주의 땅이라는 뜻의 빈란드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빈란드가 바로 만화 빈란드 사가의 그 빈란드입니다. 바이킹들은 이곳에서 약 10~20년 정도 살다가 현지 원주민들과 충돌이 발생해 정착지를 떠났습니다. 바이킹들은 이 원주민들을 스크렐링이라고 불렀는데, 고대 노르드어로 약한 사람,작은 사람,야만적인 사람을 뜻합니다.

아무튼 15세기 말 대항해시대가 시작되면서 유럽 열강의 본격적인 식민지 개척이 시작됩니다. 대표적으로 영국, 프랑스, 스페인이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세력을 넓혀 나갔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정착민의 관계가 처음부터 안 좋았던건 아닙니다.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에게 토양에 맞는 농사법을 알려주었고 유럽인들은 총기,철기,직물과 모피를 교류했습니다.

아무튼 15세기 말 대항해시대가 시작되면서 유럽 열강의 본격적인 식민지 개척이 시작됩니다. 대표적으로 영국, 프랑스, 스페인이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세력을 넓혀 나갔습니다. 당시 영국은 북아메리카 동부 해안의 13개 식민지를, 프랑스는 캐나다와 오대호, 미시시피강 유역의 광대한 뉴프랑스를, 스페인은 플로리다와 멕시코,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북아메리카 남서부의 뉴스페인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의 모피 무역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경쟁했습니다. 특히 오하이오강 유역은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양국은 서로 자신들의 영향권이라고 주장하며 대립했고, 결국 이러한 갈등은 전쟁으로 이어져 1754년 프랑스-인디언 전쟁이 발발했습니다.그러나 이 전쟁은 단순히 프랑스와 영국만의 싸움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측에는 알곤킨족, 휴런족, 아베나키족, 오타와족 등이 동맹으로 참전했고, 영국 측에는 모호크족, 오네이다족, 체로키족 등이 함께 싸웠습니다.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원주민 부족들은 프랑스가 영국보다 원주민 토지를 대규모로 침탈하는 경우가 적었고, 오랫동안 모피 무역과 군사적 동맹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프랑스를 지지했습니다. 반대로 영국과 손을 잡은 부족들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부족들과 오랜 경쟁 관계에 있었으며, 영국과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고 적대 부족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 편에 섰습니다.이 시기 유럽 열강의 식민지 경쟁은 원주민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유럽인과 원주민 사이의 갈등 역시 점차 심화되었습니다. 영국 정착민과 그들과 동맹을 맺은 원주민 부족들은 피쿼트 전쟁 당시 피쿼트족 마을을 공격해 많은 주민을 살해했으며, 반대로 포와탄족 역시 영국 정착지를 습격해 정착민들을 학살하기도 했고 이러한 충돌 과정에서 양측 모두 포로를 잡거나 고문하고 강제 이주시키는 일이 발생했고, 여성과 어린이가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영국군 측으로 참전했던 버지니아 식민지 젊은 장교가 바로 훗날 미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조지 워싱턴입니다. 결국 프랑스는 북미에서 영국과의 군사력과 보급 능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했으며, 영국에게 캐나다를 비롯한 주요 식민지 대부분을 넘겨주게 됩니다. 프랑스-인디언 전쟁을 겪은 영국은 막대한 전쟁비용을 부담하게 되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13개 식민지에 각종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이에 식민지인들이 영국 의회에 우리들의 대표는 없는데 왜 세금을 내야하나며 반발했고 특히 저항이 거셌던 곳은 뉴잉글랜드의 중심지이자 중요한 항구 도시였던 보스턴이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식민지의 저항을 통제하기 위해 보스턴에 많은 군대를 주둔시켰는데, 이는 오히려 영국군과 식민지 주민 사이의 긴장을 더욱 높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결국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1770년 3월 5일 밤, 영국 병사들을 향해 식민지 주민들이 나뭇가지, 돌, 눈덩이 등을 던졌고, 긴장하던 영국군이 총을 발포하여 5명이 숨지는 보스턴 학살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으로 식민지 내에서 영국군에 대한 반감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다만 이 사건을 ‘학살’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미국 개척 과정에서 원주민 학살과 같은 사건에는 ‘학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5명이 사망한 이 사건을 학살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한 의견도 있습니다.) 이후 영국 동인도 회사 선박에 올라 바다에 45톤의 차 상자를 던져버리는 보스턴 차 사건이 터지고 이에 영국은 보스턴 항국를 폐쇄하는 법이 포함된 강압법을 제정해 식민지를 강하게 통치했습니다.

1775년 4월 19일 영국군과 미국 식민지 민병대의 렉싱턴•콩코드 전투로 공식적으로 독립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는 영국군과 왕당파 식민지인들, 일부 북미 원주민들이 영국 측에 가담했고, 이에 맞서 영국에 반발한 식민지인들과 프랑스, 그리고 일부 원주민 부족들이 싸웠습니다. 영국군 장교 출신이었던 버지니아 식민지의 조지 워싱턴 역시 식민지인들 편에 서서 싸우게 됩니다.이후 프랑스의 참전과 스페인·네덜란드의 대영국 대립으로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고, 점차 전세는 식민지 측으로 기울게 됩니다. 결국 요크타운 전투에서 미·프 연합군에게 패배한 영국은 전쟁을 계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파리 조약을 통해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게 됩니다. 조지 워싱턴은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고, 이후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독립을 도왔던 프랑스가 훗날 프랑스 혁명으로 왕과 귀족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고 있을때,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중립을 유지한거지만 프랑스 입장에서는 기분이 많이 상했다고 합니다.

미국은 이후 프랑스 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부터 루이지애나를 구입하고,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를 넘겨받았습니다. 또한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스페인은 멕시코 독립으로 북아메리카 내 주요 식민지 대부분을 잃게 되었고, 미국 내 유럽 식민 세력의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됩니다.이후 미국은 확보한 광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고, 이를 미국의 서부 개척 운동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서부 확장은 멕시코와의 충돌로 이어졌습니다. 1846년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전쟁이 발생했고, 미국은 승리하면서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 등 현재 미국 서부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 전쟁으로 미국은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넓히게 되었고, 이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와 본격적인 서부 개척 운동의 기반이 마련됩니다.

1848년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사금이 발견되면서 1849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몰려드는 골드러시가 시작되었습니다.이를 계기로 서부 개척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약 25만 명에 달하는 이주민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서부로 떠나갔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인 이민자와 아일랜드 대기근, 유럽의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혼란을 피해 이주한 유럽인들까지 서부로 몰려들게 됩니다. 또한 미국 링컨 정부는 서부 지역에 사람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홈스테드법을 시행했습니다. 당시 많은 미국인들은 서부를 ‘주인 없는 땅’처럼 인식했으며, 정부는 일정 조건을 충족한 정착민에게 토지를 무료로 제공했습니다. 1862년 제정된 홈스테드법에 따라 정착민은 5년 동안 해당 토지에 거주하고 농사를 지으면 약 160에이커(약 19만 6천평)의 땅을 자신의 소유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범죄자들 또한 서부로 많이 건너갔고, 이처럼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자들을 무법자(Outlaws)라고 불렀습니다. 초기에는 미국 정부의 영향력이 서부 곳곳까지 미치지 못했고, 광대한 영토에 비해 부족한 행정력으로 인해 많은 지역에서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에 맞서 셰리프와 마셜 같은 법 집행관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셰리프와 마셜 모두 보안관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셰리프는 지방 정부 소속의 보안관으로 주민들의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반대로 마셜은 연방정부 소속의 보안관으로 정부에 의해 임명되어 연방법을 집행하고 범죄자를 수사하는 수사관에 가까운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서부 개척 시대를 상징하는 존재로 카우보이(Cowboy)가 있었습니다. 카우보이는 단순히 총을 든 무법자가 아니라, 주로 목장에서 소를 관리하고 장거리 이동시키는 목축 노동자였습니다. 넓은 서부 초원에서 수백 마리의 소를 몰아 철도역이나 시장으로 운송하는 일을 담당했으며, 짐승이나 가축 강도로부터 스스로와 재산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총기나 칼로 무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서부 개척 운동이 긍정적인 부분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고향에서 보호구역으로 쫓겨났고, 이 비극적인 강제 이동 과정에서 약 6만 명의 원주민들이 강제 이주를 당했고, 그 과정에서 약 1만 5천여 명이 굶주림과 추위,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또한 캘리포니아 이주 이후 정착민, 주정부, 연방 군대에 의해 다수의 원주민들이 대량학살당했습니다.

이 사진이 무엇을 보여주는지 아시나요? 바로 버팔로, 즉 아메리카들소의 두개골 무덤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주요 식량원이었던 아메리카들소는 미국 정착민들에 의해 고기와 가죽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사냥되었고, 사격 연습이나 단순한 재미를 위해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원주민들의 생계 수단을 파괴하기 위해 가죽만 벗기거나 혀만 잘라낸 뒤 시체를 그대로 방치해 썩게 만드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한때 수천만 마리에 달했던 아메리카들소는 1900년대 초반 약 300마리 수준까지 감소하게 됩니다.
또한 1861년~1865년 동안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계몽주의와 노예제 비판 운동의 영향으로 노예제 폐지 움직임이 확산되었고, 영국과 프랑스 등 여러 국가들이 노예제를 폐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이 서부로 영토를 계속 확장하면서 새롭게 편입되는 지역에서 노예제를 허용할 것인지를 두고 북부와 남부의 갈등은 점점 심해졌습니다.북부는 산업 중심의 경제 구조를 바탕으로 노예제 확대에 반대했고, 남부는 대규모 면화 농장을 유지하기 위해 노예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새로운 주가 생길 때마다 충돌했고, 결국 미국 사회는 두 세력으로 나뉘게 됩니다.1860년 노예제 확대에 반대했던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 여러 주는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아메리카 연합국(남부연합)을 수립했습니다.

북부군은 강력한 산업력과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고, 남부군은 뛰어난 장군들과 방어전에 유리한 지형을 바탕으로 우세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북부의 경제력과 생산력이 점차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결국 1863년 게티즈버그에서 양군이 맞붙게 됩니다.
1863년 당시 남부연합의 로버트 E. 리 장군은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북부 지역으로 침공했습니다. 남부는 북부 영토에서 승리해 북부의 전쟁 의지를 꺾고, 영국과 프랑스 같은 유럽 국가들이 남부를 지원하도록 만들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하지만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북부군(연방군)과 맞붙게 됩니다.

북부군: 조지 미드 장군 지휘

남부군: 로버트 E. 리 장군 지휘
전투는 3일 동안 이어졌고, 남부군은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북부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날인 7월 3일, 남부군은 약 1만 2천여 명의 대규모 돌격 공격을 감행했지만 북부군의 방어에 막히며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결국 북부군이 승리하였고 북부가 전쟁의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전쟁 말기 북부군 사령관 율리시스 S. 그랜트는 남부연합의 수도 리치먼드를 함락시키고 남부군을 계속 압박했습니다. 남부연합군 총사령관 로버트 에드워드 리는 병력과 보급이 모두 부족해지자 더 이상 전쟁을 이어가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1865년 4월 9일, 리 장군은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했고, 약 2만 8천 명의 남부군 병사들은 무기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랜트는 남부군 장교와 병사들에게 비교적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으며, 남부군 병사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용되었습니다.1865년 4월 애포머톡스에서 항복한 뒤, 리는 버지니아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전쟁 후 미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남북 간 화해를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남부연합의 항복과 함께 남북전쟁은 끝났고, 미국은 다시 하나의 국가로 통합됩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부 지역은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노예들을 이용한 농장 가문은 몰락하고 있었으며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인종 갈등은 계속되었습니다.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서부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말이 되면서 미국 정부는 더 이상 개척되지 않은 서부가 아니라, 법과 질서를 갖춘 현대 국가를 만들려 했습니다. 현상금 사냥꾼, 연방 요원,탐정사무소,철도 회사,석유 회사 등이 등장하며 과거의 무법자 시대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진행되던 1899년,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바로 《레드 데드 리뎀션 2》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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